177. 우리의 결혼제도가 잘못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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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우리의 결혼제도가 잘못된 것입니까?
나는 그 문제에 아무런 선호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관찰한다.
너희는 끊임없이 나를 선호를 가진
신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은 결혼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이 자신들에게 저지르는 짓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이혼율 통계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결혼은 너희의 사랑 체험 속에 “변함없음”,
즉 영원성을 가져오기 위해,
너희가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여자가 의지처(依支處)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남자가 변함없는 섹-스 이용권과 반려자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규약이 만들어졌고,
거래가 이루어졌다.
네가 내게 이것을 주면
나는 네게 저것을 주겠노라는 거래가,
이 점에서 결혼은 사업과 흡사했다.
그래서 계약이 맺어졌고,
쌍방 모두 그 계약을 강제할 필요가 있었기에,
결혼은 신과의 “성스런 약조”이니,
그 약조를 어기는 사람들은
신에게 벌을 받으리라고 이야기되었다.
나중에 가서 이것이 들어 먹히지 않자,
너희는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인간의 법률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먹히지 않았다.
소위 신의 법도, 또 인간의 법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결혼 서약을
깨뜨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들은
단 하나뿐인 중요 법칙인―자연법―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대다수가 행하는 식의 결혼이
특별히 아름다운 건 아니다.
그것은 개개 인간 존재가 타고 나는
세 측면의 진실 중 두 측면을 침해한다.
다시 한번 꼭대기부터 시작하자.
‘너희’는 사랑이다.
사랑인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바로 이것이 너희고,
바로 이것이 너희의 천성이다.
너희는 날 때부터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다.
따라서 너희의 천성을 침해하거나, 너희의 천성을 경시하는,
인위적인 모든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철학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물 자체가
너희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에 다름 아니니,
너희로서는 그것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너희가 결혼이라 부르는 그 제도는,
소위 정부라는 제도가 그러하듯,
안전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사실 서로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기 위해 고안된,
인위적인 사회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그 둘은 형태만 다른, 같은 것이다.
너희는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이
결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너희가 상상하는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이라면, 그렇지 않다.
너희가 고안한 대로의 결혼은
두려움의 궁극적인 선언이다.
결혼이 너희를 사랑 속에서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유롭게 해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것은 사랑의 궁극적인 선언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너희의 결혼은
자신의 사랑을 약속이나 보장의 수준으로
낮추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결혼은 지금 “그런 것”이 항상
그렇게 되도록 보장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보장이 필요하지 않다면,
너희는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이 보장을 어디에 써먹는가?
첫째, 안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너희 내면의 것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대신에.)
둘째로, 안전을 끝내 장담할 수 없을 때,
서로를 벌하기 위한 수단으로.
깨어진 결혼 약속은 거꾸로
이제 막 개시된 소송의 논거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너희는 결혼이 아주 쓸모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것이 하나같이 잘못된 이유들 때문이라 해도.
또한 결혼은 너희가 서로에게 지닌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갖지 않으리란 보장을
확보하려는 너희식 시도다.
혹은 적어도 그런 감정들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리란 보장을.
다시 말해 성적으로.
마지막으로 너희가 고안해 낸 대로의 결혼은,
“이 관계는 특별하다.
나는 이 관계를 다른 모든 관계보다
우선시하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너희의 잘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가의 문제다.
무엇이 자신을 ‘참된 자신’의
다음번 숭고한 이미지로 재창조해 주는가의 문제.
만일 “이 하나의 관계,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딱 하나의 관계만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특별하다”고 말하는
존재가 ‘참된 자신’이라면,
결혼이라는 너희의 고안물은
완벽하게 그렇게 보장해 준다.
하지만 영적 선각자로 인정받고 있거나
인정받았던 사람들 거의 다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흥미롭지 않느냐?
선각자들은 결혼이라는
너희의 지금 고안물이 끌어내려는 진술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더 특별하다는 진술―을
진실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각자는 이런 진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도 하지 않는 진술이다.
사실 너희가 지금 고안한 대로의
결혼 서약은 대단히 신답지 못한 진술을
너희가 하도록 만든다.
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약속이 그것인데도,
너희는 이것을 가장 성스러운 약속이라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역설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두려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희는 너희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신을 상상해 냈다.
그리하여 너희는 자신의 “선택받은 민족”에게 한 신의 “약속”이니,
신과 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맺어진 계약이니를 운운한다.
너희는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이라는 발상을 참아내지 못하기에,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만들어 낸다.
너희는 이 소설들을 종교라 일컫지만,
나는 그것을 불경스럽다 칭할 것이다.
신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는 식의 모든 생각이 엉터리고,
너희더러 같은 것을 진술하라고 요구하는
모든 의식이 성사(聖事)가 아닌 신성모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