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의 @눈물 한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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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고교 선배들과 만나는 모임에서였다.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어령(李御寧; 1933~2022) 교수였어.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에 두보(杜甫; 712~770, 唐)의 시를 써 놓고 해설을 하는데 황홀했었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대한민국의 지성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22년 2월에 돌아가셨다.
말하던 그 선배가 덧붙였다.
“그 양반은 낮았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거야.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라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된 천재들이 있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 (1835~1901)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족주의로 잡고 교육에 헌신했었다.
또한 우찌무라 간조(内村 鑑三; 1861~1930)는 일본인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남겼었다.
이어령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무렵의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잡지를 보고 메모를 해 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물러앉아야 해요.
새잎들이 돋는데 혼자만 남아 있는 건 삶이 아니죠.
갈 때 가지 않고 젊은 잎들 사이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쭉정이를 보세요.’
그는 아직 윤기가 있을 때 가을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귀중한 철학이었다.
죽음에 적용해도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화면에서 본 이어령 교수의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생기고 병색이 돌았다.
어느 날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이 보이고, 얼마 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병을 맞이했고 죽음 앞에서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현자의 죽음은 많은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어령 교수의 부인이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오는 걸 봤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데 항암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남편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어요.
남편은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France)의 수상록처럼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그날 생각나는 걸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쓴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손가락에 힘이 빠져 더블클릭이 안되는 거예요.
남편은 손 글씨로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 놓고 했는데 점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거예요.
그림도 없어지고 갈수록 글씨도 나빠졌어요.
건강이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거죠.”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그에 대해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펑펑 울더라구요.
그 머리가 좋던 남편이 기억이 깜빡깜빡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치매가 온다고 생각하고 또 펑펑 울었죠.
남편은 두 발로 서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중년의 미남이었던 그의 장관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금가루라도 뿌린 양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녹이 슬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순서인 죽음을 그는 어떻게 대면했을까?
인터뷰 진행자는 이어령 선생께 질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고, 탄생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간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변함이 없으신가요?"
이 질문에 이어령 선생은 그의 생각이 여전히 변함없음은 물론, 생은 선물이며 내 컵의 빈 공간과 맞닿은 태초의 은하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선생은 여태껏 살아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말해왔다며, 진짜 죽음은 슬픔조차 인식할 수 없기에 슬픈 거라고 하시며 인사 말씀을 덧붙이셨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중략)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이어령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로 가시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통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예민한 예술가였어요.
죽음 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꼈어요.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죠.
남편은 노트에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라고 썼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려고 했죠.
그런데 노트 스무장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어요.”
듣고 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물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찾은 거죠.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썼어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제목으로 정한 ‘눈물 한 방울’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자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예요.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게 진정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남편은 남긴 거예요.”
거실 깊숙이 2월의 햇살이 비쳐 들어온 어느 날, 선생은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의 온기를 즐기셨다.
그리고 2022년 2월 26일 정오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셨다.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앞에 정직해져야 할 것 같았다.
지인이 보내 준 윗글을 읽으면서 함명춘 시인의 '종(鐘) 이야기' 가 떠올랐다.
"그의 몸은 종루였고
마음은 종루에 걸린 종이었다.
종은 날마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종소리였기 때문이다.
임종 직전까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 땀방울과 눈물을 흘렸던
그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주일에 한 번씩 그가 행했던 일을 따랐다.
날이 갈수록 종소리는
점점 더 크게 더 멀리
울려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의 종소리라고 불렀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다.
사랑의 종소리가 매일, 매시간, 일생을 통해 계속 들리지만 귀가 닫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욕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한다.
교만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한다.
시기와 질투에 귀가 막힌 사람은 듣지 못한다.
열등감에 귀가 막힌 사람도 듣지 못한다.
명(明)나라 시인 진계유(陳繼儒; 1558~1639)는
“뒤에야 알았네.” 라는 당신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 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然後(연후)
靜坐 然後知 平日之氣浮 (정좌 연후지 평일지기부)
守默 然後知 平日之言燥 (수묵 연후지 평일지언조)
省事 然後知 平日之費閒 (성사 연후지 평일지비한)
閉戶 然後知 平日之交濫 (폐호 연후지 평일지교람)
寡慾 然後知 平日之病多 (과욕 연후지 평일지병다)
近情 然後知 平日之念刻 (근정 연후지 평일지념각)
시인은 ‘후회’의 감회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후회는 선택한 뒤에 따르는 경험과 연륜에 따른 진솔한 반성, 돌이킬 수 없는 애잔한 마음의 표현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각하며 사는 우리네들의 삶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수의 김형석(金亨錫; 1920~) 교수님도 어느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으시냐고 묻는 기자에게 ‘철없는 젊은 시절보다 모든 것을 알고 인생의 철이 든 6.70대가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