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는 왜 다리를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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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는 왜 다리를 안 먹어?"
어렸을 적의 일이다.
참기름을 짜는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는 주말마다 근처에서 치킨을 한 마리 사오곤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나가 돌아오면, 작업복에 배인 참기름 냄새에 더해 은근하게 풍기는 또다른 고소함이 숨어있었다.
하얀 비닐, 삐져 나온 종이 상자 모퉁이, 헐거운 고무줄, 소금봉지. 동네 싸구려 치킨집의 칠천 원짜리 통닭이다.
그래도 없이 살던 시절의 유일한 사치라 불평한 적은 없었다.
그맘때의 나는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리는 맛없어. 너 다 먹어."
"아싸. 다리가 제일 맛있는데."
나에게는 큰 횡재였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다리가 제일 맛있다는데, 친구들의 부모님 중에는 다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더랬다.
나이가 들면 다리가 싫어지는구나! 누나와 나는 열 살차였다.
맛에 대해 논하자면 가물가물하게 혀끝이 떫다.
오래 쓴 기름으로 거무튀튀한 튀김, 염지 없이 퍽퍽한 살코기. 지금 숱한 프랜차이즈 영계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었을 테지만, 문방구 앞 300원짜리 컵떡볶이나 사 먹었던 나에게는 호화로운 '고기'였다.
대신 누나는 날개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맛은 다리랑 비슷한 것 같은데 뼈를 발라내기는 귀찮고. 허겁지겁 붙잡고 뜯어먹어야 하는 나에게는 모가지만큼이나 가치가 없는 부위였다.
그렇게 항상 두 다리는 나의 몫이었고, 날개는 누나의 몫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방황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조금 철이 들었다.
누나는 어느새 주름살이 생겼고, 피부도 거칠어졌다. 아줌마라고 놀려대기는 하지만, 그쯤 되어서는 누나가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닭다리는 나의 몫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자리를 찾았다.
누나가 다니던 공장 사장님의 소개를 받아 안경공장에 들어갔다.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힘도 그럭저럭 쓸 줄 아니, 안경공장 사장님은 젊은 놈이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한다며 나를 좋게 봐줬다. 딸만 둘이라 나를 아들이나 다름없이 대해줬으니 술자리도 빈번했다.
마침 안주가 치킨이었다.
"참, 사장님도 다리 안 좋아하세요?"
"뭐어? 다리 안 좋아하는 새끼가 어딨어."
아, 그렇죠? 하하. 하고 웃는데.
한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뭐에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집에서 시키면 딸내미들한테나 주지 뭘. 밖에 나가면 이렇게."
와작. 사장님이 다리부터 집어들고 뜯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다리부터 먹지만."
열 살때부터 알고 있었다.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
"왠 치킨?"
"회식했는데 맛있길래."
세월이 많이 변했다.
열쇠를 뒤적거리던 셋방에서, 이제 엘리베이터며 도어락이며 버튼을 눌러야 하는 집이 됐다. 누나도 나도 열심히 일했으니 돈은 모였다. 소파와 텔레비전, 거실이 있는 집에 살게 됐다.
각진 누나의 얼굴만큼, 치킨은 이제 각진 박스에 담긴다.
눈꽃치즈니 고추바사삭이니 이것저것 이름도 많아서 골라 먹는 재미까지 있다. 그래도 그런 걸 여전히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사치라 생각해버리고 만다.
"야, 이게 뭐야."
"왜?"
"다리밖에 없는 걸 샀어."
"그거밖에 안 남았대."
정말로 싫어하는 걸까. 표정을 살펴보면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많이 먹고 왔으니 배가 부르다 둘러대고는, 소파에 드러누워 누나가 먹는 걸 구경하다 결국 물었다.
"다리가 맛있지 않나?"
중고 벽걸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철 지난 예능방송을 보며 낄낄대다가도. 누나는 나를 슬쩍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맛은 있지."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고.
그 한 마디 듣는 게 참 오래도 걸려서.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이나 세수를 해야 했다.
참기름을 짜는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는 주말마다 근처에서 치킨을 한 마리 사오곤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나가 돌아오면, 작업복에 배인 참기름 냄새에 더해 은근하게 풍기는 또다른 고소함이 숨어있었다.
하얀 비닐, 삐져 나온 종이 상자 모퉁이, 헐거운 고무줄, 소금봉지. 동네 싸구려 치킨집의 칠천 원짜리 통닭이다.
그래도 없이 살던 시절의 유일한 사치라 불평한 적은 없었다.
그맘때의 나는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리는 맛없어. 너 다 먹어."
"아싸. 다리가 제일 맛있는데."
나에게는 큰 횡재였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다들 다리가 제일 맛있다는데, 친구들의 부모님 중에는 다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더랬다.
나이가 들면 다리가 싫어지는구나! 누나와 나는 열 살차였다.
맛에 대해 논하자면 가물가물하게 혀끝이 떫다.
오래 쓴 기름으로 거무튀튀한 튀김, 염지 없이 퍽퍽한 살코기. 지금 숱한 프랜차이즈 영계들과 비교하면 형편없었을 테지만, 문방구 앞 300원짜리 컵떡볶이나 사 먹었던 나에게는 호화로운 '고기'였다.
대신 누나는 날개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맛은 다리랑 비슷한 것 같은데 뼈를 발라내기는 귀찮고. 허겁지겁 붙잡고 뜯어먹어야 하는 나에게는 모가지만큼이나 가치가 없는 부위였다.
그렇게 항상 두 다리는 나의 몫이었고, 날개는 누나의 몫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방황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조금 철이 들었다.
누나는 어느새 주름살이 생겼고, 피부도 거칠어졌다. 아줌마라고 놀려대기는 하지만, 그쯤 되어서는 누나가 나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닭다리는 나의 몫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자리를 찾았다.
누나가 다니던 공장 사장님의 소개를 받아 안경공장에 들어갔다. 성격은 시원시원하고 힘도 그럭저럭 쓸 줄 아니, 안경공장 사장님은 젊은 놈이 꾀 안 부리고 열심히 한다며 나를 좋게 봐줬다. 딸만 둘이라 나를 아들이나 다름없이 대해줬으니 술자리도 빈번했다.
마침 안주가 치킨이었다.
"참, 사장님도 다리 안 좋아하세요?"
"뭐어? 다리 안 좋아하는 새끼가 어딨어."
아, 그렇죠? 하하. 하고 웃는데.
한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뭐에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집에서 시키면 딸내미들한테나 주지 뭘. 밖에 나가면 이렇게."
와작. 사장님이 다리부터 집어들고 뜯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맛이 없을 리가 없다.
"다리부터 먹지만."
열 살때부터 알고 있었다.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
"왠 치킨?"
"회식했는데 맛있길래."
세월이 많이 변했다.
열쇠를 뒤적거리던 셋방에서, 이제 엘리베이터며 도어락이며 버튼을 눌러야 하는 집이 됐다. 누나도 나도 열심히 일했으니 돈은 모였다. 소파와 텔레비전, 거실이 있는 집에 살게 됐다.
각진 누나의 얼굴만큼, 치킨은 이제 각진 박스에 담긴다.
눈꽃치즈니 고추바사삭이니 이것저것 이름도 많아서 골라 먹는 재미까지 있다. 그래도 그런 걸 여전히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사치라 생각해버리고 만다.
"야, 이게 뭐야."
"왜?"
"다리밖에 없는 걸 샀어."
"그거밖에 안 남았대."
정말로 싫어하는 걸까. 표정을 살펴보면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많이 먹고 왔으니 배가 부르다 둘러대고는, 소파에 드러누워 누나가 먹는 걸 구경하다 결국 물었다.
"다리가 맛있지 않나?"
중고 벽걸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철 지난 예능방송을 보며 낄낄대다가도. 누나는 나를 슬쩍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맛은 있지."
치킨은 다리가 제일 맛있다고.
그 한 마디 듣는 게 참 오래도 걸려서.
나는 화장실에서 한참이나 세수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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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legend님의 댓글
이렇듯 동생이나 후배, 또는 연하자들을 생각하는 장자 내지는 누나의 마음을 나중에라도 기억하고 되새기며 고마워하는가 하면 그 시절의 형이나 누나가 그런 옛날 이야기를 하면, 물론 바닥까지 그 말이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가 모지래니까(바보같으니까) 그랬지!'라고 핀잔을 주는 동생도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스스로도 부끄럽고 창피한 상황이어서 어디 가서 정말 친근한 사람 아니면 이야기조차 못하는 에피소드입니다만...
전학을 한 학교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반 친구 중 한 아이의 아버지의 직업이 마도로스(선원)라고 했는데 여름방학 며칠 전에 아이스크림을 한 박스 돌리셨습니다. 그 당시의 출석 번호가 65번이었으니 선생님 몫까지면 아마 66개 이상이었겠지요!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기초생활수급대상자(그 시절 용어로 생활보호 대상자)에 해당하던 그 학생은 집에서 밀가루로 수제비를 먹는 것이 주식이었고, 어머니는 어쩌다 지은 밥이 쉬어도 차마 버리질 못하고 몇 차례 끓여서 먹거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 일전에는 동생들끼리 다른 집의 저녁 밥 먹는 모습을 장독대에서 내려다 보면서 '저 흰 쌀밥 맛있겠다!'라는 남동생의 말에 '그런 말 엄마 듣는 데서 하지 마! 엄마 슬퍼하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받치는 한스러움, 슬픔,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는 그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면 차마 다른 친구들과 같이 웃으며 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그머니 가방에서 노란 색 칠이 벗어진 양은 도시락을 꺼내고는 아이스크림을 담아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이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그 여름 하교 길은 정말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는 정도의 더위를 참고 돌아가야 하는 비탈길입니다. 그러나 그 덥고 힘든 더운 발걸음보다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우유 같기도 한 크림이 흘러내리는 가방, 그리고 그것을 보며 의아해할 주변 등하교길의 다른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참의 세월이 흐른 뒤 주변에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게 되거나 하면 거의 반자동으로 '나는 됐어!'라고 하거나 '그럼 난 하드나 하나 먹을까?' 하는 말을 건네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후 또 세월이 지나 형제들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스크림 에피소드를 듣고 다 보니 바로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가 모지래서 그런 거지!'
이 말에 참 당황스럽다거나 어이없기까지 합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그 땐 그랬지!'라고 하던가 '그거 그냥 눈 딱 감고 먹지 뭐 하러 그랬어?'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거..' 그랬더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그냥 안쓰럽기도 하고 멋쩍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의 그 절박함을 모르지는 않을 바로 아래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데, 참 어디 가서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것이 바로 '쭈쭈바', '아맛나' 등의 빙과류와 두 가지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광고 CM 송만 들으면 그런 시절 이야기들이 상기됩니다.
'12시에 만나요! ㅂㄹㅂ콘! 둘이서 만나요, ㅂㄹㅂ콘! 살짝쿵 데이트, ㅎㅌ ㅂㄹㅂ콘!'
그리고 그 경쟁 회사의 CM은 'ㄹㄸ아이스크림~' 이런 거였지요!
그리고 지금도 저는 주변인들에게 입맛 떨어지는 소리를 합니다!
'Ice cream is the eighth worst food that doctors never going to eat!'이라구요!
순위는 변동됐을 지 모르지만, 아이이스크림은 의사들이 절대로 먹지 않을 8번 째의 최악의 음식이다...
여러분, 전혀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가공된 음식보다는 덜 가공된 것으로(예를 들면 아이스크림보다는 얼린 홍시, 쥬스를 얼린 샤베트 등과 같이 건강을 생각하는 먹거리를 더 섭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점심 저는 청국장이나, 야채를 듬뿍 넣은 건강 라면 이런 걸 먹고 싶네요^^
도하조 님, 추억 돋게 하는 닭다리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따뜻한 점심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찌 생각하면 스스로도 부끄럽고 창피한 상황이어서 어디 가서 정말 친근한 사람 아니면 이야기조차 못하는 에피소드입니다만...
전학을 한 학교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반 친구 중 한 아이의 아버지의 직업이 마도로스(선원)라고 했는데 여름방학 며칠 전에 아이스크림을 한 박스 돌리셨습니다. 그 당시의 출석 번호가 65번이었으니 선생님 몫까지면 아마 66개 이상이었겠지요!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기초생활수급대상자(그 시절 용어로 생활보호 대상자)에 해당하던 그 학생은 집에서 밀가루로 수제비를 먹는 것이 주식이었고, 어머니는 어쩌다 지은 밥이 쉬어도 차마 버리질 못하고 몇 차례 끓여서 먹거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 일전에는 동생들끼리 다른 집의 저녁 밥 먹는 모습을 장독대에서 내려다 보면서 '저 흰 쌀밥 맛있겠다!'라는 남동생의 말에 '그런 말 엄마 듣는 데서 하지 마! 엄마 슬퍼하셔!'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북받치는 한스러움, 슬픔,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는 그 아이스크림이 녹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면 차마 다른 친구들과 같이 웃으며 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그머니 가방에서 노란 색 칠이 벗어진 양은 도시락을 꺼내고는 아이스크림을 담아 가방 안에 넣었습니다.
이제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그 여름 하교 길은 정말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는 정도의 더위를 참고 돌아가야 하는 비탈길입니다. 그러나 그 덥고 힘든 더운 발걸음보다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우유 같기도 한 크림이 흘러내리는 가방, 그리고 그것을 보며 의아해할 주변 등하교길의 다른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참의 세월이 흐른 뒤 주변에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게 되거나 하면 거의 반자동으로 '나는 됐어!'라고 하거나 '그럼 난 하드나 하나 먹을까?' 하는 말을 건네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후 또 세월이 지나 형제들과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스크림 에피소드를 듣고 다 보니 바로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가 모지래서 그런 거지!'
이 말에 참 당황스럽다거나 어이없기까지 합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그 땐 그랬지!'라고 하던가 '그거 그냥 눈 딱 감고 먹지 뭐 하러 그랬어?'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거..' 그랬더라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그냥 안쓰럽기도 하고 멋쩍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의 그 절박함을 모르지는 않을 바로 아래 동생이 그렇게 말하는데, 참 어디 가서 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것이 바로 '쭈쭈바', '아맛나' 등의 빙과류와 두 가지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광고 CM 송만 들으면 그런 시절 이야기들이 상기됩니다.
'12시에 만나요! ㅂㄹㅂ콘! 둘이서 만나요, ㅂㄹㅂ콘! 살짝쿵 데이트, ㅎㅌ ㅂㄹㅂ콘!'
그리고 그 경쟁 회사의 CM은 'ㄹㄸ아이스크림~' 이런 거였지요!
그리고 지금도 저는 주변인들에게 입맛 떨어지는 소리를 합니다!
'Ice cream is the eighth worst food that doctors never going to eat!'이라구요!
순위는 변동됐을 지 모르지만, 아이이스크림은 의사들이 절대로 먹지 않을 8번 째의 최악의 음식이다...
여러분, 전혀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가공된 음식보다는 덜 가공된 것으로(예를 들면 아이스크림보다는 얼린 홍시, 쥬스를 얼린 샤베트 등과 같이 건강을 생각하는 먹거리를 더 섭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점심 저는 청국장이나, 야채를 듬뿍 넣은 건강 라면 이런 걸 먹고 싶네요^^
도하조 님, 추억 돋게 하는 닭다리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따뜻한 점심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도하조님의 댓글의 댓글
리빙레전드님, 정성과 실력 가득한 댓글로 오늘도, 힘든 하루 위로를 받습니다.
어제토요일 하루를 방어진 건설 현장 휴무시키고, 12/3-4 읿박이일로,
조카 결혼식 광명으로 다녀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잘 자라온, 신랑신부2인..
13평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요즘 참 보기드문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제 여동생 큰아들은 서울 중학교 체육교사로 , 변두리 전세살이형편정도인데,
신부가 잘 이해하고 , 같이 이겨내기로 한다고 합니다.
축의금은 많이 보태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나마 많으 지지를 하고 왔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의 삶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고,
리빙레전드님에게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꾸~벅 도하조 올림
어제토요일 하루를 방어진 건설 현장 휴무시키고, 12/3-4 읿박이일로,
조카 결혼식 광명으로 다녀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잘 자라온, 신랑신부2인..
13평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 요즘 참 보기드문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제 여동생 큰아들은 서울 중학교 체육교사로 , 변두리 전세살이형편정도인데,
신부가 잘 이해하고 , 같이 이겨내기로 한다고 합니다.
축의금은 많이 보태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나마 많으 지지를 하고 왔습니다.
앞으로 이 아이들의 삶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고,
리빙레전드님에게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꾸~벅 도하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