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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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29일에 여수 여행 다녀와서 건진건 이거 하나!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말라. 나는 과거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에게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의 불화로 몇 차례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 번 이겼다.
-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말라. 나는 끊임 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는 해야 했다.
-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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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明才님의 댓글
간원이 아뢰기를,
“지평 이현당(李賢讜)은 처 사조(妻四祖)에 장리(贓吏)가 있어 대간에 합당하지 못하니 체직 시키소서.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과 몰래 매매하는 데 대한 금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금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르는 자가 계속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관(倭館)의 서리(書吏)와 고자(庫子) 등이 지금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있는데
진실로 철저히 추문하여 통렬히 다스리소서.
평시에 서리·고자·고지기 등이 장사꾼들과 교통하여 몰래 금물(禁物)을 휴대
밤에는 기구를 설치하여 담을 넘어 들어가 매매하고 낮에는 대문을 활짝 열고 공공연히 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왜노들이 왜관의 문밖에까지 나와서 시인(市人)들과 이끗을 다투며 칼을 빼들고 힐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금란 나장(禁亂羅將)이 있기는 하지만 뇌물을 달게 여겨 도리어 그들을 두둔하고 방자함을 금하지 않아서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관의 별좌(別坐) 한자(韓慈)와 이부(李郛)는 금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비루한 짓을 하기까지 했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방지기들도 아울러 추문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금단하는 방도를 각별히 엄하게 세워 간사하고 외람된 짓을 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이백록(李百祿)은, 성품이 본디 광패하여 날마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거리낌없이 멋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외람된 짓으로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였다.
“이현당 등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왜관에 대한 일은, 당초 예조의 공사를 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고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으므로 각별히 조옥(詔獄)에서 추문하게 하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예조의 공사를 보니, 금란(禁亂)은 모두 금부에 소속된 일이라지만 법에 의하면 형조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조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라.”
이는 중종 35년의 기록이다. 그런데 중종 35년은 서기 1540년이고 기묘사화는 서기 1519년에 일어났다.
무려 20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기묘사화 이후라도 이백록이 조광조의 제사라도 지내다 처벌될 수도 있겠지만
실록에 나온 이백록의 죄는 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것이지 조광조와는 무관하다.
만일 조광조와 관련이 있다면 실록에 굳이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역모사건이라면 더욱 자세히 기록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이백록이 무뢰배와 어울렸다는 것도 핵심은 아닌 듯하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의정부의 의득(議得)을 정원에 내리면서 이에 의해 시행하라고 일렀다.
윤인경 등이 의논 드리기를,
“삼가 이정(李貞)의 진소(陳訴)를 보니,
그 아비 백록(百祿)이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 때 주육(酒肉)을 갖추어 베풀고는 아들을 성혼시켰다고 잘못 녹안(錄案)되었다.
그런데 이는 그때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계본(啓本)에는 주육을 갖추어 베풀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형조(刑曹)에서 함문(緘問)할 때 주육 설판(酒肉設辦)이란 네 글자를 첨가하여 아뢰어서 의금부로 옮기고는 곤장을 쳐서 복초(服招)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계본을 상고해 보건대 주육을 설판하였다는 말은 다만 여부(女父)인 이준(李俊)에게만 언급되었고
백록에게는 언급된 바 없는데 필경 이것으로 중한 죄목이 씌워져 녹안까지 되었으니 과연 억울하다 하겠습니다.
성종(成宗)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조사(朝士)로서 그 자녀의 혼례를 치른 자가 죄는 입은 바 있으나
녹안까지는 가지 않았었습니다. 위에서 재결(裁決)하소서.
그리고 관군(館軍)이 입마(立馬)하는 괴로움이란 과연 호소한 대로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합리적으로 제도를 고쳐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사실상 양책(良策)일 것입니다.
다만 금교(金郊) 등의 각참(各站)은 바로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큰 길입니다.
지난 경인 연간에 너무 심하게 잔폐(殘弊)되어 회복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 널리 의논한 끝에 관군을 영정(永定)하여 오로지 그 일만 전담하도록 했다가 그후 또 그들의 진소(陳訴)에 의하여 다시 5년마다 서로 교체 입역(立役)하도록 논의해
바꾸었던 것으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원래 거주하던 역리(驛吏)를 지금 만약 회복시킨다면 각 참의 관군은 양감(量減)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거주하던 역리들의 회복 여부와, 봉수군(烽燧軍)과 제색(諸色)의 장인(匠人)들 중에서 부실(富實)한 사람을 뽑아서
아울러 관군에 정하는 데 대한 편의 여부 등을 본도 감사로 하여금 숙폐(宿弊)를 널리 찾아 묻고 겸하여 민정(民情)도 잘 살펴서
자세히 헤아려 계문(啓聞)케 한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위에서 재결하소서.”하였다.
이 의계는 은율(殷栗) 사람 김천령(金千齡)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전일 의계(議啓)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5년후인 명종 1년 이백록의 아들,
즉 이순신의 아버지인 이정이 올린 진소에 따라 이백록이 녹안에서 삭제된 내용으로 이정의 진소에 따르면
이백록은 국상기간에 아들의 혼례를 하면서 잔치를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잔치의 주관자는 이백록이 아닌 이정의 장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백록은 녹안에서 삭제되지만 역시 기묘사화와는 무관하다.
이 과정에 이백록이 모함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처벌받은 것 아닌 것이다.
결국 소설과 드라마에서 다루어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박은 이백록은 그야말로 허구라 보아야 한다.
사족으로 드라마에서 이백록이 사약을 받는 장면에 붉은 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색 관복이란 당상관 이상, 지금으로 치면 총리나 장관급 고위 공무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처음 인용한 실록 내용에 나온 이백록의 벼슬은 평시서봉사로 봉사는 종8품의 벼슬이다.
종8품은 요즘으로 치자면 8급공무원 정도로 당시 입던 관복의 색은 녹색이다.
그야말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이백록에 대하여 그의 손자인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발탁될 때 와도 비교 안 되게 초고속 승진을 시켜준 셈이다.
출처 : 뉴스타운(http://www.newstown.co.kr)
이 글로 보아 이순신 집안은 역적의 가문이 아니었으며 조부에 의한 잘못된 일들로 인해 파직당한 집안일 뿐이라는 걸 알 수가 있겠습니다.
또한 23전 23승이라는 기록도 제대로 살피고 고증되지 못한 사료에 의한 것으로 실제로는 45전 40승 5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지평 이현당(李賢讜)은 처 사조(妻四祖)에 장리(贓吏)가 있어 대간에 합당하지 못하니 체직 시키소서.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과 몰래 매매하는 데 대한 금법이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금법을 어기고 죄를 저지르는 자가 계속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관(倭館)의 서리(書吏)와 고자(庫子) 등이 지금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있는데
진실로 철저히 추문하여 통렬히 다스리소서.
평시에 서리·고자·고지기 등이 장사꾼들과 교통하여 몰래 금물(禁物)을 휴대
밤에는 기구를 설치하여 담을 넘어 들어가 매매하고 낮에는 대문을 활짝 열고 공공연히 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왜노들이 왜관의 문밖에까지 나와서 시인(市人)들과 이끗을 다투며 칼을 빼들고 힐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록 금란 나장(禁亂羅將)이 있기는 하지만 뇌물을 달게 여겨 도리어 그들을 두둔하고 방자함을 금하지 않아서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관의 별좌(別坐) 한자(韓慈)와 이부(李郛)는 금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비루한 짓을 하기까지 했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고 있으니,
파직시키소서.
방지기들도 아울러 추문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금단하는 방도를 각별히 엄하게 세워 간사하고 외람된 짓을 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평시서 봉사(平市署奉事) 이백록(李百祿)은, 성품이 본디 광패하여 날마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거리낌없이 멋대로 술을 마시는가 하면
외람된 짓으로 폐단을 일으킨 일이 많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답하였다.
“이현당 등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왜관에 대한 일은, 당초 예조의 공사를 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고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으므로 각별히 조옥(詔獄)에서 추문하게 하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예조의 공사를 보니, 금란(禁亂)은 모두 금부에 소속된 일이라지만 법에 의하면 형조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조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라.”
이는 중종 35년의 기록이다. 그런데 중종 35년은 서기 1540년이고 기묘사화는 서기 1519년에 일어났다.
무려 20년 이상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기묘사화 이후라도 이백록이 조광조의 제사라도 지내다 처벌될 수도 있겠지만
실록에 나온 이백록의 죄는 무뢰배들과 어울렸다는 것이지 조광조와는 무관하다.
만일 조광조와 관련이 있다면 실록에 굳이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역모사건이라면 더욱 자세히 기록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이백록이 무뢰배와 어울렸다는 것도 핵심은 아닌 듯하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의정부의 의득(議得)을 정원에 내리면서 이에 의해 시행하라고 일렀다.
윤인경 등이 의논 드리기를,
“삼가 이정(李貞)의 진소(陳訴)를 보니,
그 아비 백록(百祿)이 중종 대왕의 국휼(國恤) 때 주육(酒肉)을 갖추어 베풀고는 아들을 성혼시켰다고 잘못 녹안(錄案)되었다.
그런데 이는 그때 경상 감사(慶尙監司)의 계본(啓本)에는 주육을 갖추어 베풀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형조(刑曹)에서 함문(緘問)할 때 주육 설판(酒肉設辦)이란 네 글자를 첨가하여 아뢰어서 의금부로 옮기고는 곤장을 쳐서 복초(服招)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계본을 상고해 보건대 주육을 설판하였다는 말은 다만 여부(女父)인 이준(李俊)에게만 언급되었고
백록에게는 언급된 바 없는데 필경 이것으로 중한 죄목이 씌워져 녹안까지 되었으니 과연 억울하다 하겠습니다.
성종(成宗)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조사(朝士)로서 그 자녀의 혼례를 치른 자가 죄는 입은 바 있으나
녹안까지는 가지 않았었습니다. 위에서 재결(裁決)하소서.
그리고 관군(館軍)이 입마(立馬)하는 괴로움이란 과연 호소한 대로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합리적으로 제도를 고쳐서 그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사실상 양책(良策)일 것입니다.
다만 금교(金郊) 등의 각참(各站)은 바로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큰 길입니다.
지난 경인 연간에 너무 심하게 잔폐(殘弊)되어 회복시킬 수 있는 계책이 없었습니다.
조정에서 널리 의논한 끝에 관군을 영정(永定)하여 오로지 그 일만 전담하도록 했다가 그후 또 그들의 진소(陳訴)에 의하여 다시 5년마다 서로 교체 입역(立役)하도록 논의해
바꾸었던 것으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 원래 거주하던 역리(驛吏)를 지금 만약 회복시킨다면 각 참의 관군은 양감(量減)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거주하던 역리들의 회복 여부와, 봉수군(烽燧軍)과 제색(諸色)의 장인(匠人)들 중에서 부실(富實)한 사람을 뽑아서
아울러 관군에 정하는 데 대한 편의 여부 등을 본도 감사로 하여금 숙폐(宿弊)를 널리 찾아 묻고 겸하여 민정(民情)도 잘 살펴서
자세히 헤아려 계문(啓聞)케 한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위에서 재결하소서.”하였다.
이 의계는 은율(殷栗) 사람 김천령(金千齡)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전일 의계(議啓)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5년후인 명종 1년 이백록의 아들,
즉 이순신의 아버지인 이정이 올린 진소에 따라 이백록이 녹안에서 삭제된 내용으로 이정의 진소에 따르면
이백록은 국상기간에 아들의 혼례를 하면서 잔치를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잔치의 주관자는 이백록이 아닌 이정의 장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백록은 녹안에서 삭제되지만 역시 기묘사화와는 무관하다.
이 과정에 이백록이 모함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처벌받은 것 아닌 것이다.
결국 소설과 드라마에서 다루어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박은 이백록은 그야말로 허구라 보아야 한다.
사족으로 드라마에서 이백록이 사약을 받는 장면에 붉은 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색 관복이란 당상관 이상, 지금으로 치면 총리나 장관급 고위 공무원에 해당한다.
하지만 처음 인용한 실록 내용에 나온 이백록의 벼슬은 평시서봉사로 봉사는 종8품의 벼슬이다.
종8품은 요즘으로 치자면 8급공무원 정도로 당시 입던 관복의 색은 녹색이다.
그야말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이백록에 대하여 그의 손자인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발탁될 때 와도 비교 안 되게 초고속 승진을 시켜준 셈이다.
출처 : 뉴스타운(http://www.newstown.co.kr)
이 글로 보아 이순신 집안은 역적의 가문이 아니었으며 조부에 의한 잘못된 일들로 인해 파직당한 집안일 뿐이라는 걸 알 수가 있겠습니다.
또한 23전 23승이라는 기록도 제대로 살피고 고증되지 못한 사료에 의한 것으로 실제로는 45전 40승 5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