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의 다섯평 흙집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탑리 노인들은 많이 놀랐다고 한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전국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걸 보고 놀랐고,
병으로 고생하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연간 수 천만원 이상의 인세수입이 있는 분이란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10억원이 넘는 재산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조목조목 유언장에 밝혀 놓으신 걸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동네 노인들이 알고 있던 것처럼 권정생 선생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병들고 비천한 모습으로 살다 가셨다.
세속적인 욕심을 버렸고 명예와 문학권력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으셨다.
10여 년 전 윤석중 선생이 직접 들고 내려온 문학상과 상금을 우편으로 다시 돌려보냈고,
몇 해 전 문화방송에서 ‘느낌표’ 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던 책 읽기 캠페인에 선정도서로 결정되었을 때도 그걸 거부한 바 있다.
그때 달마다 선정된 책은 많게는 몇 백만 부씩 팔려나가는 선풍적인 바람이 불 때였는데
권선생은 그런 결정 자체를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일로 여기셨다.
권정생 선생이 사시던 집은 다섯 평짜리 흙집이다. 그 집에서 쥐들과 함께 살았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찾아간 집 댓돌에는 고무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고무신을 보고 울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신발과 옷을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신을 사들이고 다시 구석에 쌓아두면서
더 큰 신장으로 바꿀 일을 생각하는 우리의 욕망,
우리는 앞으로도 내 욕망의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다니는 삶을 살 것임을 생각하며 민망했다.
흙집 뒤에는 진보랏빛 엉겅퀴꽃이 가득 피어 있었고
그 중 한 송이가 앞마당 마루 끝에 혼자 서서 빈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선생이 드시던 것으로 보이는 뻥튀기 과자 반 봉지와 보리건빵 봉지가
어수선한 짐들 위에 놓여 있는 것도 보였다.
우리나라 어린이 문학의 가장 큰 어른은 그렇게 살다 가셨다.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선생의 뒷삶을 정리해 드려야 할 처지에 있는 이들 사이에서
이 집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열흘 전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 아무개 화백이 찾아왔을 때,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면 동생처럼 지내는 동네 아우에게 맡겨 화장해서 빌뱅이산 언덕에 뿌려달라고 하셨고, 집도 깨끗이 태워 없애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지상에서 아프게 살다간 흔적을 깨끗이 없애고 가고 싶은 선생의 마음,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권정생 선생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생이 사시던 집을 그대로 보전해야 한다는 사람도 많았다.
시청 소유의 하천 부지에 서 있는 다섯 평짜리 낡고 비루한 이 집이야말로
이 시대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양심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 집을 그대로 두고 잘 보전하면서 이곳을 찾는 이들이
지상에서의 우리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려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집을 헐어 없애게 되면 곧 지자체 등에서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한다고
번듯하고 거창한 문학관이나 생가를 짓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청빈하고 겸허하게 사신 선생님의 삶이 왜곡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사시던 가난한 모습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비로소
선생의 정신과 삶이 이 시대에 던지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시골의 쓰러져 가는 흙집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몇 해 못가 주저앉고 만다.
마음만 갖고 보전되는게 아니다. 누가 어떻게 언제까지 관리하고 보전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건
선생의 개결한 정신과 무욕의 삶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