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병동 간호사로 야간 근무할 때였다.
새벽 다섯 시쯤 갑자기 병실에서 호출 벨이 울렸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부리나케 병실로 달려갔다.
창가 쪽 침대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병동에서 가장 오래 입원 중인 환자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놀란 마음에 커튼을 열자 환자가 태연하게
사과를 내밀며 말했다.
"간호사님, 나 이것좀 깎아 주세요."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겨우 사과를 깍아 달라니, 맥이 풀렸다.
옆에선 그의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런 건 보호자에게 부탁해도 되잖아요."
"그냥좀 깎아 줘요."
다른 환자들이 깰까봐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어 사과를 깎았다.
그는 내가 사과 깎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이번에는 먹기 좋게 잘라 달라고 햇다.
나는 귀찮은 표정으로 사과를 반으로 뚝 잘잘랐다.
그러자 예쁘게 좀 깎아 달란다.
할 일도 많은데 별난 요구하는 환자가 못마땅해
못 들은 척 사과를 대충 잘라 주었다.
나는 사과 모양새를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그를 뒤로 하고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며칠 뒤, 그는 상태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십일장을 치른 그의 아내가 나를 찾아왔다.
"사실 새벽에 사과 깎아 주셨을 때 저 깨어 있었어요
그날 아침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며 깎은 사과를 내밀더라고요.
제가 사과를 참 좋아하는데 남편은 손에 힘이 없어 깎아 줄 수가 없었어요.
저를 깜짝 놀라게 하려던 마음을 지켜 주고 싶어서요.
그래서 간호사님이 바쁜 거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누워 있었어요,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정말 고마워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그 새벽, 가슴 아픈 사랑 앞에 얼마나 무심하고 어리석었던가.
한 평 남짓한 공간이 세상의 전부였던 환자와 보호자.
그들의 고된 삶을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녀가 눈물 흘리는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며 말했다.
남편이 마지막 선물을 하고 떠나게 해 줘서 고마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