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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어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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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의 어느 하루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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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을 보았다. 한우 등심 반근, 양파, 송이버섯, 양상추, 깻잎, 도토리묵, 냉동 대


구살, 달걀…… 종이 쪽지에 적어간 목록대로 쇼핑 수레에 찬거리를 담노라면 꼭 한두개


씩 별외로 추가되는 게 있기 마련이다. 아, 참기름이 떨어졌지. 저기 마요네즈도 있어야


샐러드를 만들겠군. 그렇게 소소한 생활의 품목들을 빠짐없이 챙기는 동안만은 만사를


잊고 단순해질 수 있다. 불고기를 재고 도토리묵을 무쳐야지. 대구가 적당히 녹았을 때


밀가루를 뿌려야 하니 중간에 어디 들르지 말고 빨리 집으로 가야지. 샐러드에 참치를


넣을까 말까. 적어도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택할 자유가 내 손에 달려 있을 때, 망설


임이란 늘 즐거운 법이다.



행복이란 이런 잠깐 순간에 있는 게 아닐까? 양손에 묵직이 매달린 쇼핑 봉지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왠지 가슴이 뿌듯했다. 근사하게 한상 차려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리라.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크게 틀어 놓고 분주히 싱크대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달콤


하면서도 쓰라린 선율이 폭포처럼 거실 가득히 쏟아졌다. 아, 어쩌면 이렇게 슬픔에서 기


쁨으로 빨리 넘어갈 수 있는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날 밤 요리 준비에 몰두 해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닦으며 나는 알았다. 내가 지금 사랑


의 신열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그 달콤한 지옥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


면 나의 오랜 불면증이 치유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혹 그 증세가 더 도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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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페달을 밟고>, 창작과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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