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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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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크로아티아 리카 지방에서
세르비아인 정교회 사제인 밀루틴 테슬라와 주카 테슬라(혼전성은 만디치) 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신학자가 되지 않고 과학자가 된 천재이자 20세기 초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전형을 만들어 버린 인물이다.
또한 살아온 환경을 살펴보면
여러 모로 비운의 천재이기도 하다.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 미국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언변의 소유자에, 연설도 잘 했다고 한다.

머리도 좋고 말도 잘 하고 8개국어
를 하는 언어의 천재에다 188cm의 장신에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엄친아.
당시 사교계의 스타였다.

다만 테슬라의 삶의 목적은 본인의 연구였기에, 사교계 진출도 연구를 위한 인맥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고하며, 86세까지 오래오래 살았는데 그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워낙에 매력적인 인물이니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테슬라의 일생에 친구 이상의 여성은 없었다.

동성애자니 무성애자니
논란이 많지만, 테슬라의 연구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집착을 보면 그냥 아예
관심이 없었던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본인이 "나는 결혼한 남성이 만든 훌륭한 발명품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한 적도 있고. 사실 학문에 빠져 이성에는 관심이 없었던 과학자들은 상당히 많다.

아이작 뉴턴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뉴턴은
어린 시절 친모의 재혼으로 인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혐오증을 가진 것에 가깝고, 테슬라 본인은 그냥 순수하게 결혼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오해와는 달리 뉴턴은 이성을 전부 혐오하진 않았다.

반면 테슬라의 누나와
여동생인 안젤리나와 밀카, 마리카는
결혼하여 자녀들을 두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 군 당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나, 이후에 받지 못하여 졸업을 하지 못 하였다.
그 후 체코 프라하 대학으로 옳겼으나
역시 등록금 문제로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후
에디슨 컴퍼니에서 일했으나, 직류에
올인을 외치는 토머스 에디슨과 대립,
회사를 뛰쳐나와 투자자를 긁어모아
자기 회사를 세운다.

그의 교류전기에 대한
실험이 성공을 거두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많은 투자자들이 몰렸고, 거금의 투자
와 특허비 지급을 약속한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직류 vs 교류 문제로
에디슨과 엄청나게 싸웠다는 것은 역사에서
이 대립을 전류 전쟁(War of Currents)으로 따로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일로 나중에(1915년) 에디슨과 노벨물리학상 공동 후보로 올랐을 때 서로 "저 놈이랑 같이 받느니 안 받고 만다"고 악담을 퍼부어 댔다는 루머가 있다.

특허 포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1. 당시 에디슨 전기회사(제너럴 일렉트릭)와의 직류 vs 교류 전쟁에서 테슬라의 파트너였던 웨스팅 하우스는 교류 전류 전송방식을 특허내서 같이 돈 많이 벌자고 제안했으나, 자신보다는 인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며 특허등록을 거부했다는 설.
​2. 미국 정부의 나이아가라 수력발전 건립의 발전형식으로서 직류방식의 전력사업을 벌이고 있는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과 교류방식의 전력사업을 시작하는 웨스팅 하우스(테슬라)가 경쟁이 붙었는데,
결국 교류 방식이 채택 되었고, 그에 따라
교류 방식이 전기공급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직류방식을 고집했던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은 전기공급시장
에서 밀려날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JP 모건의 지원으로 재정이 탄탄한
제너럴 일렉트릭은 부실한 재정상태인
웨스팅 하우스(테슬라)를 질 것이 뻔한
특허소송들로 압박하였고, 결국 자금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웨스팅 하우스는 교류전류에대한 특허를 포기하였다는 설.

테슬라는 사건 이후 웨스팅하우스와 의견 대립 끝에 회사를 그냥 뛰쳐 나와 버렸다.

원래는 직류 전송 방식이 먼저 연구가
시작되어 발전소와 전력망을 만드는 등
먼저 쓰였으나, 결국 변압이 용이하며
장거리 송전에서 손실이 적은 점 등, 교류가가진 여러 장점으로 인해 에디슨의 직류 전송방식은 일반 전기 분야에서 사장되고, 세계적으로 교류 전송 방식이 쓰이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어떻게든 지게 만들기
위해 로비도 하고 언론에 선전도 하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를 전기로 태워 죽이는 실험을 많이 해서 주변의 고양이와 개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정도. 교류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교류를 이용한 사형용 전기의자를 만들어서 사형수에게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번 전기를 통한 후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날 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관하던 간수에게 "차라리 화형을 하시죠"라는 말을 들을 정도.
결국 승리한 것은 교류.

그다지 수익성 있는 발명을 하지 못하여
상업화되지 못한 채 사라진 물건들이 많은
데다, 에디슨과 맞먹을 정도로 성격이
나빴었다고 한다.

특히나 독선적인 고집불통에다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는데, 그런 면으로 인해 조수나 동료는 물론이고 투자자들과도 언쟁을 자주 벌이고 안하무인으로 상대를 대해 한때는 조력자였던 대다수 지인과 친구들이 나중에는 대거 절교를 하거나 원수가 되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형광등의 경우 그 발명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품화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른 사람
이었고, 심지어 전 세계에 형광등을 보급
하여 떼돈을 번 회사는 바로 최대의 라이벌
에디슨이 만든 GE였다. 그 탓에 기껏 고생해서 고안해 낸 발명도 개발비가 없어
묻혀버린 경우가 많았다.

친구나 동료, 가족은 남아나질 않았으나
그래도 지지자, 추종자들이 많아서 만년이
별로 불행하지 않았던 굉장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노년기에는 호텔방과 임대주택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비둘기에게 모이나
주는 가난한 삶을 살다가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사진은 4장 남아있다고 한다.
테슬라가 성격이 에디슨보다 더 나쁘고
독선적인 고집불통에 타협을 모르는 성격에, 다른 사람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했다는 여러 일화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맞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원체 테슬라의 일생의
적지 않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고,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행적들도 일반인들 보기에는 하도 기묘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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