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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리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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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리의 이미지/이철우]
온 땅에 금싸라기를 아낌없이 뿌려 놓은 듯 햇살이 눈부신 9월의 아침이었다.
지난해에도 다짐했던 것처럼 올 여름에는 붙잡는 일상들을 뿌리치고 가족들과 함께 멋진 휴가를 다녀오리라고 다짐했건만 바쁜 직장생활에 쫓기어 휴가철이 훨씬 지난 가을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겨우 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몇년 만에 가는 휴가인지라 아내는 들떠서 연신 함박웃음이었고 아들의 작은 주둥이는 꽃잎이 되었다.
이박 삼일동안 동해안 국도를 타고 강원도를 거쳐 안동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청송을 경유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천지리라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불현듯, 십몇 년이 훨씬 넘었을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회사업무로 포항에서 안동으로 가던 중이었다. 차창너머로 보이는 수려한 계곡과 짙 푸른 신록의 물결을 지나 흙 내음 묻어 나는 바람이 볼을 간지르고 때 이르게 피어 난 코스모스가 남실거리는 평화로운 시골풍경에 흠뻑 취하여 꿈결처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마주오던 차의 운전자가 한눈을 팔았는지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경적을 울릴 여유도 없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황급하게 핸들을 꺾었는데 그만 내 차가 길옆 도랑에 바퀴가 빠지고 말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에서 내리는데, 나와 충돌할 뻔 했던 차는 한참을 지나쳐 정지한채 운전석으로 고개를 내밀어 힐끔 쳐다보더니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도랑에서 빠져나오려고 엑셀을 힘껏 밟아 보았지만 헛바퀴에 더 깊이 빠질 뿐이였다. 난감하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고 도망 가버린 운전자에게 정말 화가 났다. 드물게 지나가는 차들도 쳐다보기만 할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견인차를 부를까..!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서 경운기가 한 대 오고 있었다. 경운기가 가까이 오자, 손을 들어 경운기를 세우고 할아버지에게 사정을 말씀드린 후에 차를 경운기로 좀 끌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혹시나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을 드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그러지 뭐..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 조심하지 쯧쯧.”
하시며 쉬이 부탁을 들어주셨다. 하얀 백발에 노란 장화를 신으신 할아버지는 조그만 체구에 구부정한 허리를 굽혀 도랑에 빠진 차를 이리 저리 살펴보시더니
“밧줄이 있어야 돼! 그래야 끌어당길 수가 있어..근데 지금은 밧줄이 없으니까 좀 기다려 봐! 내가 집에 가서 밧줄을 가지고 올테니까” 라고 하시고선 경운기를 몰고 어디론가 가셨다.
20여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경운기가 보였다. 할아버지가 오고 계셨다. 나는 얼른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기다리는 동안 내내 “할아버지가 오지 않으시면 어쩌지..! 혹시 할아버지께서 귀찮으시니까 그냥 둘러 대신게 아닐까”
라며 할아버지를 세상에 때 묻은 속물근성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차와 경운기를 밧줄로 연결하여 여러번의 시름 끝에 마침내 차를 길 위로 끌어 내게 되었다. 얼마나 그 할아버지가 감사하던지....!, 그 무더운 날 땡볕아래에 비 오듯 땀을 흘리시며 도와준 할아버지가 너무 감사해서 조금의 사례를 하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시는 게 아닌가!
몇 번을 감사의 표시라며 성의를 받으시라고 해도 끝내 거절하시기에
하는 수 없어서 허리를 넙쭉 넙쭉 숙이며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몇 번이고 인사를 드리고 막 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잠깐 기다려 봐”
라고 하시더니 경운기 뒤에 실려 있던 사과 몇 개를 집어 주시며
“가는 길에 먹어.. 바람에 떨어진 거 주운 것인데 먹기에는 괜찮아” 라고 하셨다.
굵게 패인 주름살에 무표정한 할아버지가 거친 손으로 내미는 사과를 받아 들며
가슴이 뻐근해져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마운 할아버지의 마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집에 돌아 올 때 까지 끝내 그 사과를 먹지 않았다. 아니,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나무 그늘아래 앉아 쉬면서 아내와 아들에게 오래전에 있었던 봄볕보다 더 따스했던 그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내와 아들도 짐짓 감동한 모양이었다. 짠순이 아내가 일어서서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길가 노상에서 과일을 파는 할머니에게 사과를 한 보따리나 사가지고 왔다. 더구나 몇 개 더 달라는 말도, 깎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할아버지 한 분으로 인해 이 지역 전체가 이렇게 오랫동안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구나.. 지금껏 나는 어떤 모습을 보이며 살아 왔을까! 나는 세상을 홀로 보지만 내가 처음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내 모습을 투영하여 내가 속한 직장과 지역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되겠구나! 바람결에 흔들리는 풀잎 한조각도 더욱 살가운 것은 그 할아버지의 고마움이 아직도 가슴에서 식지 않아서인데 나는 왜 그리 차갑게만 살아왔을까” 라고....
산천을 둘러보니 한잎 두잎 단풍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참 고마우셨던 할아버지..지금도 살아
계실까! 건강하셔야 할 텐데..” 라고 중얼거리며 그곳을 떠나 올 때에
그 할아버지로 인해 그 동네와 산천까지 고향처럼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 산등성이에 푸른 저 청솔처럼
부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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