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나이 관점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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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신나이 관점 정리
신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은 그냥 있다, 그리고 신이란 게 그런 것이다.
자신이 신과 ‘하나’임을 아는 사람들이나
내면의 신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구한테도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고,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임을 과시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라면,
너희는 자신이 신임을 모른다는 것이기에,
너희 현실 속에서 이 “알지 못함”이 자신을 과시할 것이다.
결국 너희는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들이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라며 그를 조롱했을 때,
예수라 불린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일 후, 어떤 목격자도,
어떤 관중도, 뭔가를 증명해 줘야 할 어떤 사람도 없을 때,
그는 놀랍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부족한 엄청난 일을 가만히 소리 없이 해냈다.
그때 이후로 세상은 두고두고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가 구원을 찾을 곳이 이런 기적에서다.
예수만이 아니라 ‘너희 자신’에 관한 진리를
너희에게 보여 주는 이런 기적은,
너희가 지금껏 들어왔고 진리로 받아들였던
너희 자신에 관한 거짓말에서 너희를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너희를 ‘자신’에 관한 가장 고귀한 생각으로 초대한다.
너희 행성에도 지금 이 순간,
이런 여러 고귀한 생각들을 드러내 온 사람들이 있다.
물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게 하고,
그들 자신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게 하며,
나아가 몸을 하고 “영원히 살거나”,
몸으로 돌아와 다시 사는 것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 이 모두가 그들의 믿음,
그들의 앎, 세상과 세상 이치에 대한
그들의 변치 않는 명료함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육신 형상을 한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해낼 때마다,
너희는 그 사건들을 기적이라 부르고
그 사람들을 성자와 현인으로 삼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너희보다 더 성자와 현인인 건 아니다.
너희 모두가 성자이고 현인이기 때문이니,
그들이 너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어째서 당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죠?
진실로 신이 존재하고, 당신이 바로 그라면,
왜 당신은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나는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그렇게 해왔으며,
지금도 또 한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아니고,
반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확연한 드러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컨대 바로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어디 계시는데요?
네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
아니, 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식말입니다.
그게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는 건가?
너는 나를 어떤 형상, 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려는 거냐?
당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형상이나 모습으로요.
나는 너희가 이해하는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누구나 하나같이 자기네가 본 것이
신의 많은 형상이나 모습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형상이자 모습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가 보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자기네가 보는 대로의 존재인 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특정 순간에 화(化)한 무엇이 아니라,
‘위대한 보이지 않음’Great Unseen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아닌 것이 나다.
나는 없음am―notness에서 나오고 항상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내가 특정의 형상, 곧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형상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그 형상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야 했다면,
앞서 나를 본 사람들은 이들에게,
나타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네에게 나타났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똑같은 것을 말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나일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 자신을 어떤 형상,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어떤 형상을 하든
반박할 수 없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신은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통해
신 자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내면 체험으로
신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외부 관찰은 필요하지 않다.
또, 외부 관찰이 필요하다면 내면 체험은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신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요청 행동 자체가 곧 신이 그곳에 없다는,
즉 신의 어떤 것도 지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에.
그런 진술은 그런 체험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생각은 창조력을 갖고 있고,
너희의 말은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생각과 말은 함께 어우러져
너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신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체험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청하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