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저희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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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저희가 어떻게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나요?
(너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은 너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든 너희가 그 순간의 삶을 알아차리는 그 찰나,
너희는 곧바로 죽음과 상실을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는 삶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반쪽만을 알 것이다.
각각의 순간은 그것이 시작되는 그 찰나에 끝난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한,
너희는 그 속에 든 절묘함을 보지 못할 것이니,
그 순간을 평범하다 일컬을 것이다.
각각의 상호작용은
그것이 “시작하기 시작하자” 마자
“끝나기 시작한다.”
이것을 진실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했을 때,
그때 서야 비로소 모든 순간과 삶 자체에
가득한 보물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삶은 너희에게 자신을 줄 수 없다.
아니, 너희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너희는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삶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님을 이해하는 순간,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죽음 역시 환상임을 이해할 때,
너희는 “오, 죽음이여,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죽음을 즐길 수도 있다!
너희는 다른 누군가의 죽음까지도 즐길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게 이상한가?
오직 너희가 죽음―과 삶―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오직 그럴 때만 그럴 것이다.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작이다.
죽음은 문 열림이지, 문 닫힘이 아니다.
삶이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죽음이 환상, 계속해서
너희가 몸을 무척 염려하도록 만듦으로써
너희 몸을 너희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는 몸이 아니니,
몸의 파멸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죽음은, 너희에게 진짜인 건 삶임을 가르칠 테고,
삶은 피할 수 없는 건 죽음이 아니라
무상성(無常性)impermanence임을 가르친다.
무상성만이 유일하게 진리다.
항상 그대로인 건 없다.
천지 만물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대로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성permanence이라는
개념 자체도 뭔가가 의미를 가지려면
무상성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성조차 무상하다.
이것을 깊이 살펴보고,
이 진리를 응시하라.
그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리니.
이것이 법(法)이요,
이것이 부처다.
이것은 부처 법이다.
이것은 가르침이자 스승이요,
교훈이자 선각자다.
이것은 둥글게 말려서
하나가 된 대상이자 관찰자다.
그것들이 하나 아니 다른 것이었던 적은 없다.
삶이 눈앞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그것들을 펼친 건 너희였다.
그러나 너희 앞에 펼쳐진 자신의 삶을 볼 때,
너희 자신이 끌러지게 하지는 마라.
자신을 묶어둬라!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즐겨라!
하지만 환상이 되지는 마라!
너희는 환상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다.
너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너희의 환상을 이용하라.
그것을 이용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삶의 더 많은 것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게 하라.
꽃을 죽어가는 것으로 보면 그 꽃이 슬퍼 보이겠지만,
그 꽃을 바뀌고 있고 얼마 안 가
열매 맺을 나무 전체의 일부로 본다면,
그때 너희는 그 꽃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꽃의 피고 짐을 나무가
열매 맺을 준비를 갖추는 표지로 이해할 때,
그때 너희는 삶을 이해하리니.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봐라.
그러면 너희는 삶이 그 자체로 비유임을 이해할 것이다.
언제나 잊지 마라.
너희는 꽃이 아니며,
그렇다고 열매도 아니다.
너희는 나무다.
너희의 뿌리는 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너희가 싹을 틔운 흙이니,
너희의 꽃과 열매는 내게로 돌아와
더 비옥한 흙을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생명을 낳으니,
그것은 영원히 죽음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