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왜 두려움조차 사랑의 표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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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왜 두려움조차 사랑의 표현인가요?
서러움과 노여움, 부러움,
두려움, 사랑이라는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이 있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 속에는
사랑과 두려움이라는 마지막 두 차원이 있다.
사랑과 두려움은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 안에 포함되는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된다.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 중 나머지 셋은
모두 이 두 감정의 부산물들이다.
모든 생각이 결국에는
사랑 아니면 두려움에 뒷받침된다.
이것은 위대한 양극성이자,
으뜸가는 이원성이다.
궁극에 가서는 모든 것이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생각과 관념, 개념, 이해, 결정, 선택, 행동들이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근거로 한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니, 사랑이 그것이다.
사실 존재하는 건 사랑뿐이다.
두려움조차 사랑의 부산물이어서,
효과적으로 쓰여지면 사랑을 표현한다.
두려움도 사랑을 표현한다.
그것의 가장 고귀한 형태에서는, 그렇다.
모든 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 가장 고귀한 표현 형태에서는.
아이가 차에 치여 죽지 않도록 구해내는 부모는
두려움을 표현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표현하는가? (두려움이 사랑을 표현한다)
여기서 가장 고귀한 형태의 두려움은
사랑이 됨을……, 두려움으로 표현된…… 사랑임을 본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런 감정들인
서러움과 노여움과 부러움도 눈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모두가 이런저런 형태의 두려움이면서,
또한 이런저런 형태의 사랑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가져온다.
이해하겠느냐?
문제는 다섯 가지 자연스런 감정이
왜곡되기 시작할 때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주 이상야릇해져서
전혀 사랑의 부산물로 인식할 수 없다.
사랑의 존재인 신으로 인식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