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히틀러가 천국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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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히틀러가 천국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째,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그는 지옥에 갈 수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밖에 남아 있지 않다.
둘째, 우주에는 어떤 “옳음”도, 어떤 “그름”도 존재 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틀러의 행위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그의 행동들은 너희가 잘못mistake이라고 할 만한 것들,
즉 진화되지 않은 존재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유죄 판결로 벌줄 수는 없다.
너희 모두에게 자유 선택권을 준 것은 내 의지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너희를 벌 받게 하는 건 내 의지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너희의 선택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리란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어찌 너희가 진실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느냐?
그건 대체 무슨 종류의 선택권이냐?
셋째, 히틀러가 몇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잘못이라고 한다면,
“내가 너희에게 소위 죽음이란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는 지상에서의 삶이 천국에서의 삶보다 낫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음의 순간에 너희는 지금까지 맛본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유와 가장 위대한 평화와
가장 위대한 기쁨과 가장 위대한 사랑을 실감할 것이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해악이나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다.
그 영혼들은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지상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죽음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넷째, 너는 신의 의지, 즉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을 믿느냐?
모든 사건이 ‘신의 행위’이다.
너는 내가 일어나길 원치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만일 내가 너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면
너희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내가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시기상조였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너희가 모든 것에서, 너희가 동의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특히나)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에서까지
완전한 완벽성을 볼 때, 너희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히틀러가 한 집단―이 경우에는 그의 국민들―을 조종했던 건,
그 교활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수사(修辭) 덕분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편리하게도 그 모든 비난을 히틀러의 발밑에만 던지는 격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 위치에.
하지만 몇백만 명의 협력과 지지와 자발적인 복종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게르만인이라고 부르는
그 2차 집단은 당연히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위 인류라는 더 큰 집단 역시 어느 정도 그렇게 해야 한다.
설령 그들이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쳐도,
그들은 가장 차가운 마음을 가진 고립주의자들조차
더 이상 무시해 버릴 수 없을 만큼
독일에서의 고통이 광범하게 확산될 때까지도,
그것을 무심하고 냉담하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치 운동 성장에 비옥한 토양이 되었던 건
패거리 의식 collective consciousness이다.
히틀러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지,
그가 그 순간을 창조한 건 아니다.
이것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해서 분리와 우월성에 대해 떠들어대는
집단의식은 대중이 동정을 잃게 만드니,
동정을 잃게 되면 그다음엔 당연히 양심을 잃기 마련이다.
너희가 ‘히틀러 체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집단의식 덕분이기 때문이다.
‘히틀러 체험’이 끔찍함은 그가 인류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류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용납했다는 사실에 있고,
그 체험의 경악스러움은 히틀러가 나섰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섰다는 사실에도 있으며,
그 체험의 부끄러움은 히틀러가
몇백만의 유태인들을 죽였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히틀러가 제지당하기 전에
몇백만이 유태인들이 죽어야 했다는 사실에도 있다.
그리하여 ‘히틀러 체험’의 목적은
인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