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최대의 악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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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최대의 악이란 무엇입니까?
순수하게 영적이고 비전(秘典)적인 측면에서 물러나
실제 적용의 문제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좋은 뜻과 좋은 열의를 지닌 사람들,
또 꽤 강한 종교성을 지닌 사람들은 흔히 낡은 지혜의 가르침에 따라,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경우(대개의 경우)
이런 행동은 계속해서 남용(濫用)과 푸대접을 낳고,
고작해야 관계의 역기능을 가져올 뿐이다.
결국 남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 한 그 사람은,
즉 쉽게 용서해 주고, 연민을 나타내며,
문제 있는 행동을 계속 눈감아준 그 사람은
심지어 신에 대해서조차 억울해하고 분개하고 불신한다.
설사 사랑이란 이름을 걸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신이라는 작자가 그처럼 끝없는 고통과
불쾌함과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신은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은 단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너희 자신도 포함시키라고 요구할 뿐이다.
신은 한 걸음 더 나가,
자신을 우선시하라고 제안하고 권한다.
나는 너희 가운데 일부가 이것을 불경이라 말하고,
따라서 이건 ‘내’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리란 걸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일부는 거기서 한술 더 떠,
이것을 내 말로 받아들이되,
신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정당화하려는 자기네 목적에 맞게
그것을 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할 것이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자신을 우선시하는 건
결코 신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한 것이,
신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결과로 드러난다면,
문제는 자신을 우선시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지를 잘못 이해한 데 있다.
물론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이냐를 판단하려면
먼저 자신이 하려는 게 무엇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단계를 간과하고 넘어가곤 한다.
너희는 무엇에 “이르고자” 하는가?
네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비전적 측면들은 제쳐놓고 현실 문제로 들어가서,
너희가 남용 당하는 상황에서도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만 알아낸다면,
적어도 너희는 그 남용만은 그만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와 가해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남용해도 좋은 상황에서는
가해자 자신조차도 남용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남용할 수 있는 상황은
가해자를 치유해 주는 게 아니라 망치게 만든다.
가해자가 자신의 남용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거기서 뭘 배우겠는가?
반대로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음을 깨우칠 때,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남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반드시 남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허용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다루면서 일찌감치 이런 진리를 터득한다.
어른들이 다른 어른들을 상대할 때는
그렇게 빨리 이 진리를 터득하지는 못한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을 상대할 때 역시 그러하고.
그러나 독재자들이 제멋대로 활개 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독재자임을 그만두게 하려면 거꾸로 그들에게 독재를 행사해야 한다.
너희 자신에 대한 사랑과 독재자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존재하는 게 오직 사랑뿐이라면
어떻게 인간들이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까?”라는
너희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따금 인간들은 자신의 참모습,
즉 전쟁을 혐오하는 존재라는 가장 위대한 진술을 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이따금 너희는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선각자들 가운데는 너희가 그 모든 걸 기꺼이 버릴 때까지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친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자아를 “갖기” 위해서,
결코 전쟁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라는 자아상(傷)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역사는 인간들에게 그런 결단을 요구해 왔다.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들에서도 똑같은 것이 적용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자기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아님’의 측면을 보여야 하는 경우를 한두 번 이상씩은 겪기 마련이다.
이런 얘기는 이상주의자인 젊은이들에게는
대단히 모순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어느 정도 세상을 산 사람들이라면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성숙한 사람들이 회고해 보면,
신성한 이분법으로 비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서 상처받았을 때,
상대방에게 “상처를 되돌려” 줘야 한다는 건 아니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고.)
이것은 단지 누군가가 계속해서 해를 끼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너희 자신을 위해서나
그 사람을 위해서나 가장 사랑에 찬 행동은 아니란 이야기다.
이런 주장은, 지고한 사랑이라면 소위 악이란 것에 대해
어떤 강제도 가할 필요가 없다는 일부 평화주의 이론들을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논의는 다시 한번 비전(秘典)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탐구하자면
“악”이라는 용어와 그에 관련된 가치판단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객관 현상과 체험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삶의 목적 자체가 점점 더 커져가는
무수한 현상들의 무더기 속에서,
소위 악이라는 몇 가지 산재된 현상들을 가려내길 너희에게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자신도,
또 다른 어떤 것도 선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신을 인식하거나 창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너희는 소위 악이라는 것과
소위 선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악이라 규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악이다.
너희는 이 삶에서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상대계 속에 살고 있다.
이것, 즉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규정하며,
그렇게 하고자 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체험의 장을 제공해 주는 것이,
바로 관계의 기능이자 동시에 목적이다.
신처럼 되는 것이 순교자가 되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희생자가 되는 걸 뜻하지 않는 건 더 말할 나위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