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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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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사과>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무렵, 여름의 끝자락 일 때였다. 시골의 오후가 되면 모두 소를 몰고 산이나 들판으로 풀을 뜯어 먹이러 매일같이 나갔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하여 소가 없었으나 가끔 형들을 따라 가곤 했다. 소를 몰고 자주 가는 하천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큰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근처에서 수영도 하고 물장구치며 노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그 저수지 건너 산비탈에는 사과나무가 즐비하게 늘어 선 큰 과수원이 있었다. 어느 날, 서산에 해가 한 뼘 정도 남았을 때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수지 너머 과수원을 바라보노라니 빠알간 사과가 너무도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유혹을 못 이기고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이브의 마음이 그러 했을까! 모두 다 말없이 물끄러머 저수지 너머의 그 과수원을 응시하고 있을 때에 형들 중에 한명이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영을 잘하니깐 호수를 건너서 사과를 서리해 먹자”는 것이었다.
그 과수원은 돌아서 가려면 수km를 가시밭길을 헤치고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둘러 가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 같았으면 저수지를 헤엄쳐서 건너는 것을 엄두도 내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가뭄으로 인해 호수의 물이 많이 줄어들어 폭이 좁아져 있었기에 충분히 건너 갈수 있을 것 같았다.
형들은 “너는 아직 어리니 따라 오지 말라”는 걸 나는 먹고 싶은 그 새빨간 사과의 유혹을 견딜 수 없어서 “나도 저 정도는 충분히 건널 수 있어”라고 억지로 떼를 써서 마침내 그 저수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저수지를 절반쯤 지나왔을까! 형들은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고 나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너무 멀리와 되돌아 갈수도 없었다. 앞서가던 형들 중에 한명이 가끔씩 뒤돌아보며 빨리 오라고 소리쳤으나 그 형들도 지쳐가던 터라 점점 힘이 빠져가는 나를 데리러 오진 못했다.
시퍼런 호숫물이 자꾸만 내 발을 밑으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사력을 다해 헤엄을 쳤다. 이제 불과 몇 십 미터만 더 가면 되는데.. 먼저 호숫가에 도착한 형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렇지만 힘이 빠져 완전히 탈진해버린 나는 팔과 다리를 더 움직일 수 없었고 허우적거리다 뿌연 저수지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나니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왜 따라 왔을까...?
엄마..나 죽을 것 같아..
하나님 살려 주세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 버둥거리는데 엄마한번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나는 초주검이 되어 물가로 끌려 나왔다. 뒤돌아보며 빨리 오라던 형이 먼저 물가에 도착했다가 허우적대는 나를 보고 비료 포대를 주워 공기를 불어 넣어서 그것을 붙잡고 헤엄쳐 와 구해 준 것이었다. 물가에 끌려 나와 나는 끊임없이 구토를 하였고 그 와중에 형들이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서 그 빨간 사과를 한 움큼씩 따 가지고 왔다. 힘없이 바위에 기대어 있는 나에게 형들이 사과를 와삭와삭 맛있게도 베어 먹으며 나에게 먹으라고 제일 크고 색깔이 진한 사과를 골라 건넸으나 나는 호숫물을 너무 많이 마시고 심하게 구토했던 터라 한입도 먹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흐르고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되돌아가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형들은 다시 호수를 건너가려고 하는데 나는 다시는 그 저수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형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km의 산길을 돌아가려면 너무 늦어 소를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걸어서 갈 테니 형들은 먼저가라"고 했다. 형들이 저수지를 다 건너갈 때 쯤 나는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터에 가파른 길, 가시덤불이 지옥 같았다.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니 검은 저수지의 철렁이는 물속에서 무엇인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워 허둥지둥 걷다보니 옷자락에 꽁꽁 싸두었던 몇 개의 빨간 사과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저 멀리 동네 불빛이 보이고 저수지 둑에 다다를 무렵,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들에게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어머니가 나를 찾으러 달려오셨던 것이다. 지치고 긁힌 채 탈진한 내 엉덩이를 두어 차례 손바닥으로 내리치시고는 어머니는 하천에 조약돌보다 더 굵은 눈물방울을 마구 쏟아 내셨다. 그 굵은 눈물방울 속에 들어있던 별들도 함께 떨어져 내렸다. 내 가슴도 왠지 가시에 긁힌 상처보다 더 많이 아팠다. 집에 다 올 때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가끔씩 긴 한숨만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하늘에다 자꾸만 쏟아 내셨다.
이튿날 어머니가 읍내 장에 갖다 오셨는데 사과를 한 봉지 사오셨다.
“엄마도 하나 먹어” 라고 사과를 건네며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는데 어머니 눈이 빨간 사과처럼 붉어져 있었다.
출처 - 계간에세이 수필부문 대상 수상작/ 이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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