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답게 사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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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선생이 남기신 ''사람답게 사는 길''의 한 부분으로 ''철학적 정신''을 강조하신 내용 입니다.
기원전 399년 봄, 70세의 노철인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태연자약하게 그의생애의 막을 내렸다.
그는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테네의 5백명의 배심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떠날 때는 왔다.
우리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간다.
누가 더 행복할 것이냐, 오직 신神만이 안다.“
나는 62년 7월과 82년 1월 두 번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은
그 유명한 감옥소의 유적을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40세에서 70세에 이르기까지 약 30년 동안
아테네 시민의 정신혁명을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다.
부패 타락한 아테네 사람들의 양심과 생활을 바로잡기 위하여, 교만과 허영 속에서
방황하는 청년들의 인격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그는 아테네
거리에 나가서 시민들과 대화하고 가르치고 질책하고 호소하고 계도하였다.
그러나 아테네의 어리석은 민중은 그를 법정에 고소했다.
그 소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정한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神)을 끌어들이고,
또 청년을 부패 타락시켰다.
그 죄는 마땅히 죽음에 해당한다.“
소크라테스는 ’불신앙과 청년의 유혹’이라는 두 죄명에 의해서 고소되었다.
아테네 시민 5백명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두 차례의 투표 결과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아테네의 어리석은 시민이다.
민중은 사리사욕에 휩쓸리면 한심한 우중(愚衆)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히면
IQ 80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민중은 올바른 지각을 가지면 슬기로운 현중(賢衆)이 된다.
민중은 우중이 되기도 하고, 현중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어두운 반동세력도 되고, 역사의 밝은 개혁세력도 된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했는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민중이었다.
민중의 질(質)이 문제다.
아테네 시민의 무지와 악의와 오판이 위대한 철인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는 것은 진리를 죽인 것이요, 정의를 죽인 것이다.
진리와 정의를 죽인 나라는 반드시 쇠망한다.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아테네는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지 61년이 되는 해다.
아테네는 역사의 심판과 징벌을 받았다.
역사는 반드시 준엄하게 심판한다.
우리는 역사의 이 진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테네의 사랑하는 시민들이여,
여러분들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와 위력으로 명성을 자랑하면서,
될수록 돈이나 많이 모을 생각을 하고 또 이름이나 명예에만 관심이 쏠려서
지혜와 진리와 자기의 인격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존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어떻게’라는 말이 가장 중요하다.
누구도 매국노나 배신자나 변절자나 살인범이나 패륜아나 강도나 매춘부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인생을 바로 살기를 원한다.
바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첫째로 진실하게 사는 것이요,
둘째로 아름답게 사는 것이요,
셋째로 보람 있게 사는 것이다.
거짓되게 살고 추잡하게 살고 무의미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바로’라는 말이 제일 중요하다.
말도 바로 하고, 생각도 바로 하고, 행동도 바로 하고 생활도 바로 해야 한다.
정치도 바로 하고, 경제도 바로 하고, 교육도 바로 하고 모든 것을 바로 해야 한다.
잘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살아야 잘살 수 있다.
바로 살지 않고는 제대로 잘살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또 외쳤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죽는 연습. 죽는 공부. 죽는 준비, 죽는 훈련을 하는 학문이다.
언제 죽더라도 태연자약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 자리를 준비하는 것이 철학이다.
확고부동한 사생관을 확립하고 조용하게 죽을 수 있는 정신적 준비를 하는 것이
철학의 궁극 목표다.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여라.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다.”
<에밀>을 쓴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말이다.
한국인은 철학이 없는 국민이다.
철학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혼탁한 난세를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투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정신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그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안병욱 에세이 <사람답게 사는 길> 중에서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blfn&articlen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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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자님의 댓글의 댓글
한국인은 철학이 없는 국민이다.
철학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 혼탁한 난세를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투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에 저의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개천절이 있습니다. 하늘의 열려 내려온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입니다.
국수주의를 말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한민족의 전통은 항상 하늘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공경하고 부모에는 효도하며 부부 화합하고 자손에는 그만한 책임을 가지고 교육에 그토록 심혈을 기우리며 자신들조차 불살라 버리는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온 민족 그 민족이 바로 우리 ..우리는 그런 민족입니다.
철학이 없이 사는 것은 공허하고 우리는 철학이 없는 민족이라는 것은 자기는 그 위에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수행이 따로 있나요? 본 수행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고도의 수행입니다. 이 속에 영적 성숙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철학은 우리의 본래인 진아의 입장에서 보면 한쪽 면일 뿐입니다 진정한 철학이라면 바로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그 삶속에서 비록 허접해 보이는 사람들 하나하나 그 자체로도 누구는 뭐하다 높고 낮다, 덜하다 뭐하다 라는 말은 이렇게 한심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영혼은 인간이 만든 이 지구라는 틀 속에서의 한 삶의 수단 철학이라는 것일진데, 그 철학이 있다 없다 감히 누가 논할 수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모든 것일진데, 더 높은 철학은 우리 자신 스스로입니다. 그 우리자신 속에는 모든 철학과 논리와 이성 그리고 과학이 있지만, 더 나아가 보면, 우리의 본래 자체는 가장 높고도 귀한 존재 그 자체입니다.
철학이라고 이렇듯이 잘못 강조하면, 알량한 자기를 자신만의 틀 속에 스스로는 가두는 것입니다.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일까요? 가르친다는 것은 우리의 본래 자체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친다는 것의 진정한 뜻은 나눈다는 것입니다. 내것을 가르친다가 아니라 내것을 나눈다라는 것이 옳은 말입니다. 각자가 높아보이든 낮아보이든 뭐든지 실상의 세계에서는 없는 것입니다. 이 지구에서 알아야 얼마나 알 것이며 지식이라야 얼마나 되는지 진정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진정한 깨달음은 천상천하에 모두에서 나 홀로 고귀하고 높다는 것인데, 이를 깨달으면 진정한 그 말의 의미는 나 = 우리라는 것입니다. 누리 각자의 나는 근원에서는 우리이며 하나입이다. 또한 그 하나 속에 우리가 있고 우리가 다 나와 하나입니다.
이런 철학은 위의 비판으로는 도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철하기 없다고 한탄하는 자 스스로가 가장 철학이 없고 실상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이다.
우리의 본성 본래는 온전하며 완전하고 더 이상도 이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즉 원래 우리 원초생명인 영들은 죄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영혼의 성숙을 위한 고통 속에서 죄는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를 질타하고 누구에게 질타를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진짜 우리 본래를 깨달아내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죄는 없습니다. 더 깊은 철학도 없습니다. 일어나 타나나는 모든 것이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만 깨닫는다면, 우리 영혼들은 모두가 같은 능력치에 각각 개성과, 관심, 그리고 독특성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하나이면서도 천차만별로 다를 뿐입니다. 그래야 이 천라만상이 나타나고 사라져가 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철학이 없다 있다 논함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각해 내어 그 상태에서 모든 것을 대하고 오직 감사와 기쁨 그리고 사랑만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 본성본래를 깨달아 이를 맘껏 표현하고 서로 이웃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쓰다보니 서두가 없어져 보이는데, 제 마음을 보는 분은 아실 것이요, 느끼는 자들은 모두 스스로 진정 느낄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사랑하며 오직 완전한 기쁨을 다시 이끌어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livinglegend님의 댓글의 댓글
안병욱 님의 글을 교과서에서 접했던 기억이 나는데 조금 더 건방을 떨자면 참 시대착오적인? 내지는 지금의 현실들을 반영하지 못하는, 너무 이상적이고 높게만 느껴지더라는 겁니다.
님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님의 글을 읽으면 많은 부분들이 저의 사고방식과 유사함을 느끼게 되는데, 다만 '나=우리' 와 같은 도식적인? 등식화 같은 부분은 어떤 사고 방향으로는 맞을 수도 있으나 어떤 이들에게는 '비약'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듯 또 다릅니다.
자신의 생각과 명상으로 세상을 안을 수 있고 그 세상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또 서로 교통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만으로 자족하기만 한다면, 물론 그 나름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자신이라는 한계에 갇혀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ㅜㅜ
저는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깨너머로, 또 귀동냥으로 알게 된 잡학사전 식 지식이지만, 이 세상 모든 사유의 끝은 사실 절대자가 아닌 인간 자체여야 한다고 우직하게 생각합니다.
고행, 율법, 정죄, 윤회 등만을 생각한다면 종교나 신앙의 존재 의미는 없겠지요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경우 행복의 보편화 또 사상으로만 끝날 것 같으니 말씀입니다.
개똥철학이지만, 우리가 학창시절에 듣고 배웠던 기본적이고 민속적인 사상의 부분들이 전혀 지금의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늘 우리의 피 안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天地之間 萬物之中 人間最貴' 또는 '弘益人間' 등의 말씀들이 그저 지금은 희미해진 상식적인 한문 시간 답안지 안에만 머무는 개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즉,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이 살아오고 있는 것이 삶인 것이고 아는 것,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 말씀입니다.
거창하고 그럴듯하게 어떤 dogma를 내세우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 인간 자체의 안녕, 행복이 가장 큰 가치고 목표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개ㄸ철학이지만, 사람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시고 글 주셔서 소통해주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