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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명의 자식과 한 명의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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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57세에 혼자 몸이 되셨다. 나의 이혼 소식에 쓰러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하셨고 그렇게도 현명하셨던 엄마는 

정신이 반 나간 아줌마가 되어 큰오빠와 작은오빠의 눈치보기에 바빴다.


이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큰오빠의 말에 그 큰집을 팔아 큰오빠에게 맡겼고 나는 몰라라고 하는 큰오빠 때문에 작은 오빠의 모든 원망을 다 감수해야 하였다.


사이가 좋았던 팔남매가 큰오빠 때문에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점점 엄마의 표정은 굳어져갔고 노름하는 아들한테 조차 할 말을 못하는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괜찮아 엄마, 엄마는 우리들 여덟을 잘 키웠고, 큰오빠가 지금 자리를 잡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지, 효자잖어. 이젠 우리 걱정 그만하고 애인이나 만들어 즐기고 살어!”


“난 애인은 안돼. 너희 아빠 같은 남자가 없어.”


그러던 엄마가 어느 날 나에게 슬그머니 말씀하셨다.

“남자 친구가 생겼단다. 작년에 해운대 바닷가 갔다가 만났는데 괜찮은 것 같아 가끔 같이 등산간단다.'


“어쩐지, 자꾸 등산을 가시더라. 뭐 하는 분이신데?”


“개인병원 의사인데 사별했대.”


“이번 엄마 환갑 때 초대해요. 내가 언니 오빠들한테 말해 놓을께.”


우리는 엄마 생신 때 호텔 연회장을 하나 빌렸고 엄마 지인들과 여고 동창들을 다 초대하였다. 그리고 그 아저씨도...


엄마 남자친구는 멋졌다. 그리고 엄마와 어울렸으며 아버지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 더 좋았다.


“아들들이 재혼을 원한다는데 어쩌지? 혼자 계시는 아버지가 좀 그렇다네.”


모두들 찬성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빠가 길길이 뛰었다.

“안돼 엄마 그런 게 어딨어, 우리 불쌍한 아버진 어쩌라구! 이 나이에도 남자가 필요해?우리 자식들을 보며 살면 안돼? 창피해! 형은 장남이 되어 가지고 엄마 모시기 싫어서 그래? 내가 모실터이니 걱정마. 그럼 아버지 제사 땐 어쩔껀데, 엄마! 아직 난 엄마가 필요하다고!”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미친 놈이 보기 싫어 형제들은 다 가버렸고 소리를 지르며 퍼붓는 나를 엄마가 막으셨다.

“그만해라, 없었던 일로 하마.”


그리고 다음 해 어느 날 술이 잔뜩 취해 올캐와 싸움했다는 작은 오빠의 전화가 오고 가지말라고 말리는 나를 뒤로하고 간 엄마를 다음날에 병원의 응급실에서 만났다.


새벽에 얼까봐 수돗물을 틀어 놓으려고 나오셨다가 쓰러져서 늦게 발견된 엄마! 우리 자식들은 중환자 실에 누워 계시는 혼수상태의 엄마를 처음에는 매일 붙어 있었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에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슬슬 볼일들을 보기 시작하였고 면회할 시간을 지켜 기다리고 있는 분은 병원을 맡기고 온 원장님 뿐이었다.


우리는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뿐이었는데 원장님은 엄마를 주무르며 계속 속삭였다.

“박 여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우리 전에 시장가서 먹었던 선지국밥! 그거 먹으러 갑시다. 내가 사준 원피스도 빨리 입어 봐야지요!”


병원에서 우리 형제에게 말하였다.

“이제는 병원에서 해줄 것은 없습니다. 퇴원하셔야 됩니다.”


'식물인간'이라는 판정과 함께 어디로 모셔갈 것인지를 정해 줘야 차로 모셔다 준다고 말하였다.


큰 올캐가 먼저 자신은 환자를 모시는 건 못한다고 말하고, 둘째 오빠는 맞벌이라 안된다고 말하였다.


장가도 안간 스물 여덞 살의 막내동생은 울기만 하였다.


딸들 표정은 당연히 큰오빠가 모셔야지 본인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난 결국 내 집인 줄은 알지만 그런 형제들 꼴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제가 감히 한 마디 해도 되나요?' 언제 오셨는지 우리

곁으로 오신 원장님이 말하였다.

“제가 그때 박 여사와 재혼을 말했을 때 박 여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아직 우리 애들한텐 엄마가 필요한가봐요. 애들이

내가 필요없다 하면 그때 갈께요' 했어요. 지금도 엄마가 필요하세요? 난 저렇게 누워있는 사람이라도 숨만 쉬고 있는 박 여사가 필요합니다. 나한테 맡겨주세요. 내 병원이 더 편할 것입니다.”


결국 엄마는 퇴원을 못하고 돌아가셨다. 모두 저 마다 믿는 신에게 기도했겠지만 난 엄마에게 부탁하였다.

“엄마! 엄마의 이뻤던 모습만 보고 먼저 간 아버지는 잊고 엄마의 병든 모습까지 사랑한 이 원장님만 기억하고 가, 엄마! 엄마는 팔남매를 키운 공은 보지 못하고 가셨지만 여자로 사랑만큼은 멋있었어.”


67세에 우리 엄마는 가슴 졸이며 평생 키운 팔남매가 아닌 몇 년 만난 남자의 손을 잡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감동의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처한 환경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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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 1 페이지

kwd05님의 댓글

입으로만 효도 하자는 자식들 꼴을 보자면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하여 한달만 지나면  병문안도 제대로 안합디다.
자식은 물론 며느리는 서서있다가 바쁘다고 가버리고
그래도 딸 들은 자주와서 혹은 자고도 가고 하면서 손을 잡고 이야기 하지만
자식 이란게 품안에 자식이지 다자라고 출가하고 나면 ...
미우나 고우나 내옆에서 항상 같이있는 사람이 최고인  것  같아요
있을때 잘해야 되겠네요.

livinglegend님의 댓글

그렇군요... 무언가 답답했다가 시원한(?) 느낌도 있구요!
우리 살아가는 세상, 세월이 그리 크거나 길지도 않은데...
 오랫 동안 누릴 것 다 누리지 못하는데,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바람은 채우지 못하고 안타까움 속에 지내다가 결국 마지막 소원조차 풀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세태가 달라진다 해도 그런 마음가짐은 아마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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