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컨텐츠 정보
- 8,236 조회
- 4 댓글
-
목록
본문
"자네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지?"
남자는 소복이 어깨에 내려 앉은 진눈깨비도 털지 않은채 말했다.밤새도록 걸어온것 같았다.
마침 하프를 손질하고 있던 이야기 상점의 주인 모리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무례한 불청객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몹시도 초조해 보였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이렇게 이른 아침에."
"이야기가 필요하네.눈물샘에서 단한방울의 눈물도 남김없이 흘리게 만들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남자가 낡은 쇼파에 앉았다.모리는 그가 외투에 묻은 진눈개비를 털고 실내에 들어오길 바랬으나 그는 그런 사소한
예의도 잊어버린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몹시도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그런 이야기가 꼭 필요하신가 보죠?"
"필요하고 말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눈에선 헤묵은 사연이 넘실거렸다.그의 사정은 길어질것 같아 모리는 서둘러 포도주를 한잔 따라
건넸다.으레 그러하듯 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목을 축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중요한 순간 긴장감을 놓치게 되곤 하니까.
남자는 단숨에 잔을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오래전 나는 왕궁의 이야기꾼이였네.왕성에 들린 귀족들과 손님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합해 풀어놓곤 했지.
이뢰뵈도 나는 다른 이야기꾼들에 비해 능숙했다네.많은 귀족들이 내 이야기를 좋아했고 내가 입을 열면 구름처럼
몰려들었네.나는 얼마든지 이야기 할수 있었지.
나에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재능이 있었어.몇번이나 많은 자들이 내 이야기 때문에 여러가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았어.왕국의 한 재상은 웃느라고 관료회의에 늦었고 한 귀족 부인의 코르셋은 찢어져 흉칙한 뱃살이 툭 튀어나와 버렸네.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였지.그뿐인가?어떤 여인은 차를 접시에 쏟고
있는 것도 몰랐으며 많은 하인들이 내 이야기를 듣으며 가느라 기둥에 부딪혀 접시를 깨곤했네.
그럴때 마다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네.
내 이야기가 사람의 정신을 홀릴수 있다니!!!"
"굉장한 일이군요.세상엔 수많은 이야기 꾼이 있지만 사람들이 체통을 잊어버릴정도의 이야기를 조합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드문데요.신의 선물이였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신의 선물이지.
하지만 신이란 놈은 원래 줄것을 다 주는 법이 없다네.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을줄 알았지만 내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운 이야기 뿐이였네.해피엔딩.그것 뿐이였어.다른 끝은 전혀 지어내지 못했지."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많은 자들이 해피엔딩에서 위안을 얻지요.
어쩌면 즐거운 끝이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알고 있네.물론 그조차 분에 넘치는 재능이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네.나를 그렇게 위로했지.
'사람들은 행복한 결말을 좋아해'라고 말일세."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 이웃나라 왕자가 왕궁의 하나뿐인 공주의 17번째 생일에 열린 무도회에 참석했네.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준수한 젊은이였지.그렇게 매력적인 남자는 처음봤네.
내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막 소녀틔를 벗어나고 있던 공주의 눈에는 어련했겠나.
공주는 그에게 한눈에 반했네.흔한 이야기속에 나오는 것처럼 말일세."
"아, 저도 들었던것 같습니다.공주의 사랑노래는 꽤 유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지.그렇다면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공주의 사랑이 순탄치 못했다는 것을 말일세.
왕자는 무척이나 오만한 사내였어.그에겐 이 작은 왕국은 눈에도 차지 않았고 주근깨 투성이의 공주에겐
더더욱 관심없었네.그는 애원하는 공주를 뿌리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어.
그 이후 공주는 깊은 슬픔에 잠겨 매일같이 울었지.
나는 그때부터 그녀가 웃는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지."
남자는 목이 탄듯 인상을 찌푸렸다.모리는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 재빨리 그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어느날 일이였지,공주가 나를 불렀네.
사실 나는 그녀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지.그녀는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즐거운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어.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슬픈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했지.
나는 할수 없었어.나는 오직 즐거운 이야기만을 할수 있었으니까.
어쩔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것은 슬픈이야기를 원하던 공주를 화나게 했어.
나는 왕국에서 쫒겨나고 말았다네.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았네.슬픈이야기를 할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어.
억지로 이야기를 조합해 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우스꽝 스러웠지.하지만 결심했네.언젠가 공주에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내가 만들수 없다면 그런 이야기를 찾아서 들려주기로 말이야.
그리고 듣게 된거야. 버드나무 숲에사는 한 이야기 상점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가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말이야.나는 급히 이곳을 찾아왔네.
지금은 이렇게 자네 앞에 앉아있는 거구 말야."
"그렇습니다.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그것을 당신에게 드릴수도 있지요."
모리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내게 무엇을 줄수 있습니까?"
"나는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네.나의 이야기에 매료된 자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지.
이것이면 작은 왕궁을 하나 살수도 있네.평생 무리없이 떵떵거리며 살수 있어.
산더미 같은 금화와 은화 그리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네.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자네에게 주겠어.
싫다고는 하지 못하겠지."
모리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의 어떠한 보화도 이 이야기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이야기의 가치를.
이야기는 결코 돈으로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세상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
그것을 주셔야만 하지요.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가진 재물이 아니지요."
"아니, 그럼 어떻해야 하는가?"
모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야기.이야기를 주셉시오. 당신의 즐거운 이야기를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서로 바꿀수 있을겁니다.
당신의 즐거운 이야기의 재능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교환합시다."
"이야기를….?"
모리의 말에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것 같았다.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이야기를 바꾸세."
"괜찮으시겠습니까.그것은 슬픈 이야기보다 훌륭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부정했다.
"세상에 슬픈 이야기보다 훌륭한것은 없어.결국 공주가 원한것은 슬픈 이야기였으니까,
사랑을 잃은 슬픔을 달래줄수 있는건 슬픈이야기였던 걸세.
자, 나와 이야기를 바꾸세나."
모리와 남자는 그렇게 마법의 약을 마시고 둘의 이야기를 바꾸었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왕궁으로 떠났다.
훌륭한 이야기꾼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금세 왕국에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은 남자를 불러 공주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공주는 아직도 슬픔에 잠겨있었다.
다시 대면한 공주에게 남자는 예의 바르게 인사한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입을 열었다.
너무 울어서 핼쑥해진 공주는 이야기꾼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이젠 우느라 지쳤어요.즐거운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지만 남자는 이미 모리와 재능을 교환했기 때문에 즐거운 이야기를 할수 없었다.
그는 결국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해야했고, 그것을 들은 공주는 너무 슬퍼진 나머지 3일 밤낮으로 울다
그만 죽어버렸다.
왕은 크게 노하여 남자를 묶어 무거운 돌을 달아 강에 처박았다.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으며 남자는 즐거운 이야기가 최고의 이야기 였다는걸 깨달았다.
하지만 막 그것을 깨달았을때, 그는 숨이막혀 죽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