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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筆寫)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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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筆寫) 효과>


주말마다 취미 삼아 약초나 버섯을 찾아 산을 헤맨 세월이 어느덧 17년을 훌쩍 넘었다. 초기에 잡풀과 도라지조차 구별하지 못하고 노루처럼 산을 뛰어다니기만 하던 나에게 약초에 대해 가르쳐주신 전문 심마니 선배님이 계셨다. 2년 정도 같이 산을 다니게 되자 웬만큼은 약초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와 가방을 열면 결과물은 항상 많은 차이가 났다. 선배의 가방 속에는 굵고 실한 여러 가지 수확물이 가득했지만 내 가방 안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내심 약이 바짝 오른 나는 산행을 갈 때마다 선배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나갔고 더 넓게 산비탈을 뒤졌다. 그렇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지쳐서 앉아 쉬고 있던 나에게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 그렇게 다니면 얼마 못 가 지쳐. 산은 쉬엄쉬엄 다녀야 해. 그리고 자네가 약초를 왜 못 찾는지 알아. 급하기 때문이야. 눈으로 보듬고 발로 따라 적는 것처럼 찬찬히 살펴야 해. 가끔 멈춰서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봐.” 나직한 목소리의 말이었지만 그 몇 마디는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참 동안 그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그리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천천히 걸으며 풀숲 속을 살피자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약초나 버섯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처음으로 선배보다 더 묵직해진 가방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선배가 가르쳐 준 짧은 교훈은 항상 급하고 덜렁대기만 하던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중에서도 독서하는 습관을 바꾸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무조건 책을 많이 읽는 게 좋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웬만큼 두꺼운 책도 몇 시간 만에 다 읽었지만 이해가 잘되지 않는 책은 읽지 않았다. 특히 시집이 그런 경우가 많았다. 간만에 책장에 묵혀두었던 시집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문득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선배님이 산을 다닐 때 눈으로 보고 써 내려가듯 다니라 했으니 시(詩)도 보지만 말고 한번 따라 적어보자” 


처음에는 지루하고 손목이 저렸지만 한장 두장 따라 쓸수록 내면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해되지 않던 문장들이 이해되었고 시를 쓴 저자의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지막 시를 따라 적고 볼펜을 내려놓으니 내 가슴은 책 속의 시인과 물아일체가 된 채 시적 감성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정서가 안정되고 지치고 상처 난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따라 적으며 몸으로 새긴 기억인지라 책 속의 내용이 오랫동안 잊히지도 않았다. 


눈으로 보기만 하는 독서와, 눈으로 보고 따라 적는 독서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자격증을 하나 취득하려 해도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정답을 찾아낼 수 있듯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더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아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삶에 적용할 수 없다면 온전한 지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와닿는 글귀나 영감을 주는 문장은 부분적으로나마 꼭 따라 적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습관은 놀랍도록 나의 정신세계를 함양시켜주었음은 물론이다. 


필사는 책을 손으로 베끼어 쓴다는 뜻이다. 그 실효성은 지대하다. 문장력 향상은 물론이거니와 심리 치유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필사를 꾸준히 해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쓰는 과정에서 타인의 의견을 통해 자신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어 마음이 정화되고, 머릿속이 깨끗해지며, 실패나 억울한 일에 대한 분노를 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쓰면서 자신도 치유받은 것이다. 또한 따라 적으면 책을 이해하며 느리게 읽게 되어 깊이 있는 독서로 인해 메타인지(문장이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효과도 더불어 발생한다.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시를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러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시에 대한 기법이나 분석을 하지 말고 좋은 시집 몇 권 정성껏 따라 적어보라고.” 또 누군가 내게 묻는다. 책을 봐도 자꾸 까먹어 시험에 매번 떨어지는데 좋은 방법 없느냐고. 다시 이렇게 대답한다. “중요한 내용을 추려 몇 번 따라 적어보라고.”


출처 ㅡ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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